※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6월호에 게재됐습니다.
허재의 마지막 붉은 투혼…그리고 옥에 티, 태업? 부상?
‘농구대통령’ 허재가 선수로 마지막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달성한 건 원주 TG(현 DB) 소속이었던 2003-2004시즌이다. 이때도 그의 투혼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됐다. 대구 동양과의 챔피언결정전 5차전 1차 연장전. 허재는 루즈볼을 따내기 위해 몸을 던지는 과정에서 마르커스 힉스에게 깔리며 갈비뼈가 부러졌지만, 이송을 거부했다.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트레이너의 부축을 받으며 경기를 끝까지 지켜봤다. 어떻게든 동료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TG는 3차 연장까지 가는 혈투 끝에 허재에게 승리를 안겼다. 이어 3승 2패 상황서 맞은 6차전에서도 67-63 신승을 따냈다. 허재는 TG가 우승을 확정 지은 경기 종료 1초 전 데이비드 잭슨과 교체됐고, 선수로서 마지막 우승 확정 순간을 코트에서 누릴 수 있었다.
충분히 감동적인 스토리지만, 허재가 이보다 더 만화 같은 스토리를 만든 건 1997-1998시즌 챔피언결정전이었다. 부산 기아(현 울산 현대모비스)의 간판스타였던 허재는 시즌이 끝난 후 트레이드가 예정된 터였다. 그래서 경남 LG(현 창원 LG)와의 4강에서 손등뼈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고도 대전 현대(현 부산 KCC)와의 챔피언결정전 출전까지 강행했다.
그만큼 기아에서의 마지막 시즌을 우승으로 장식하겠다는 의지가 강했지만, 허재의 몸은 성할 날이 없었다. 집중 견제를 받아 발목과 허벅지까지 다쳤고, 조니 맥도웰의 팔꿈치에 맞아 눈썹 부위가 찢어지기도 했다. 트레이너가 지혈 후 붕대를 감으려 하자, 허재는 “지금 뭐 하자는 거야!?”라며 소리쳤다. 붕대를 감으면 시야가 가려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상남자!
붕대 대신 테이핑으로 지혈을 마친 허재는 부상 이전과 다름없는 공격력을 뽐내며 현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허재는 7경기 모두 선발 출전, 5차전만 36분 48초를 소화했을 뿐 이외의 6경기는 풀타임을 소화했다. 평균 기록은 23점 3점슛 3.6개 4.3리바운드 6.4어시스트 3.6스틸.
허재의 활약에도 기아는 3승 4패에 그쳐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허재의 붉은 투혼은 기자단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유효투표수 37표 가운데 19표를 받으며 플레이오프 MVP에 선정됐다. 준우승팀 소속 선수가 플레이오프 MVP를 차지한 건 여전히 유일무이한 사례로 남아있다. 맞대결했던 이상민 역시 경기 종료 직후 꽃다발을 건네며 허재의 투혼에 박수를 보냈다.
기아 사령탑을 맡았던 최인선 감독은 “당시 공식적인 이유는 ‘종아리 부상’이었지만, 챔피언결정전을 앞두고 갑자기 재계약을 보장해달라고 하더라. 들어줄 수 없는 요구라고 했더니 그때부터 태업해서 속 썩었다. 피닉스가 5분만 더 뛰었으면 이기는 시리즈였다”라고 회고했다.
시간이 흘러 2025년 2월. 피닉스는 미국 출장 중이었던 정지욱 본지 편집장과의 인터뷰에서 “진짜 아파서 뛸 수 없었다. 왜 우승하고 싶지 않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태업이라 믿고 있었던 나로선 ‘엥? 이건 또 무슨 소리지?’란 생각이 절로 드는 인터뷰였다.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일이니 이제 와서 진실게임을 할 수도, 타입슬림 영화 속 주인공처럼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분명한 건 시리즈 결과도, 어떤 논란도 허재가 붉은 유니폼을 입고 남겼던 마지막 투혼만큼은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전래동화처럼 느껴지는 독자들이 있다면 유튜브를 통해서라도 찾아보길 권한다. 결말을 알고 있어도 짜릿함이 느껴지는 한 편의 농구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전신 시절 포함 챔피언결정전 7차전을 두 차례 이상 경험한 팀은 KCC, 현대모비스, SK 세 팀이다. KCC는 세 차례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7차전 승률 100%를 자랑한다. 현대모비스는 앞서 언급한 기아 시절 준우승에 그쳤지만, 부산 KTF(현 수원 KT)와 맞붙은 2006-2007시즌에는 통합우승을 달성하며 명가의 부활을 알렸다.
반면, SK는 7차전 승률이 0%다. 세 차례 모두 준우승에 머물렀다. 리버스 스윕을 눈앞에서 놓친 2024-2025시즌뿐만 아니라 안양 KGC(현 정관장)와 맞붙은 2022-2023시즌 챔피언결정전 역시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을 터.
3승 2패로 앞선 상황서 맞은 6차전. SK는 3쿼터 종료 1분여 전 15점 차로 달아나며 우승에 다가서는 듯했지만, 작전타임을 요청해 오히려 KGC에 정비할 시간을 제공했다. 결국 SK는 역전패했고, KBL 출범 첫 7차전 연장전이라는 혈투 끝에 준우승에 머물렀다. 눈앞에 뒀던 역대 두 번째 리핏을 놓친 후, 전희철 감독은 납회식에서 눈물을 쏟으며 “더 강한 SK로 돌아오겠다”라는 다짐을 남겼다.
SK는 2001-2002시즌에도 챔피언결정전 7차전을 치른 경험이 있다. 2022-2023시즌만큼 극적인 전개는 아니었지만, 아쉽지 않은 7차전 준우승이 어딨으랴. SK는 당시에도 3승 2패 우위를 점하며 V2를 눈앞에 두는 듯했다.
5차전에서 종료 3초 전 조상현이 2점 차를 뒤집는 위닝 3점슛을 터뜨렸지만, 이는 2018년 4월 12일 김선형이 극적인 위닝샷(이 슛도 경기 종료 3초전 나왔다)을 성공하기 전까지 무려 16년 동안 SK의 챔피언결정전 승리를 이끈 마지막 위닝샷으로 남아있었다. 6차전에서 77-88로 패한 SK는 7차전에서도 1쿼터 막판 역전을 허용한 후 줄곧 끌려다닌 끝에 65-75로 패, 정상 탈환에 실패했다.
조상현 감독이 외국선수를 언급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SK는 공수 겸장으로 활약했던 로데릭 하니발이 정규리그 중반 손등 골절상을 당하며 이탈했다. 일시 교체와 완전 교체를 두고 고민하던 SK는 정규리그 1위를 지키기 위해 완전 교체를 결정했지만,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패착이 됐다. 정규리그도, 챔피언결정전도 우승에 실패했으니 말이다.
하니발을 대신해 영입한 제이미 부커는 개인 기록(11.2점 4.3리바운드)도, 팀 성적(7승 5패)도 신통치 않았다. 부커 영입 후 2위로 내려앉은 SK는 또 한 번의 외국선수 교체를 단행했는데, 최인선 감독은 “부커 정도의 외국선수는 데려올 수 있을 줄 알았다”라며 당시 선택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악몽에 시달렸던 SK의 오랜 팬이라면 잊을 수 없는 그 선수, 박건연 당시 코치가 “더한 놈이 왔다”라고 회고했던 그 선수. 찰스 존스가 SK의 선택을 받은 마지막 외국선수였다. 존스는 자유투(성공률 85.3%)만 좋았을 뿐 공수에 걸쳐 어떠한 경쟁력도 보여주지 못했다. 상대팀 국내선수조차 집중 공략할 정도였으니 SK로선 플레이오프에서 존스를 기용하는 것을 더욱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4강 5경기 중 3경기 평균 11분 40초(당시 외국선수 제도 역시 2명 보유 2명 출전이었다)를 소화하는 데에 그쳤던 존스는 챔피언결정전조차 1차전 7분 36초를 뛴 게 전부였다. 10분도 버티지 못하는 사태가 거듭되자, SK 코칭스태프는 결국 시리즈가 끝나기도 전 그를 미국으로 돌려보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정확한 출국 시점을 기억하는 관계자는 없었지만, 기록상 존스가 챔피언결정전 엔트리에 포함된 건 1차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럼에도 SK는 김승현-김병철-전희철-마르커스 힉스-라이언 페리맨으로 구성된 동양을 7차전까지 물고 늘어졌다. 서장훈, 조상현, 에릭 마틴 모두 줄부상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준우승 중 우승’이라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투혼이었다.
조상현 감독은 “(서)장훈이 형이 외국선수와 같은 경쟁력을 보여줬지만, 챔피언결정전에서는 아무래도 하니발의 공백이 컸다. (하니발이 다치지 않았다면?)우승했다고 단언할 순 없겠지만, 경기 내용은 더 좋았을 것 같다”라고 돌아봤다.
전자랜드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개그랜드’라 불리며 암흑기를 걸었던 창단 초기, “인천으로 돌아오겠다”라는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던 마지막 시즌 등등 저마다의 추억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윤도현이 불렀던 경쾌한 로고송을 흥얼거릴지도 모르겠지만, 점프볼 독자라면 창단 처음이자 마지막 챔피언결정전(2018-2019시즌) 못지않게 2014-2015시즌을 기억하는 이들도 많을 거라 확신한다.
‘졌잘싸’의 유래를 알 순 없지만, 2014-2015시즌 전자랜드만큼 이 단어가 어울리는 팀이 또 있을까. ‘개그랜드’라는 조롱을 받던 전자랜드가 서서히 맷집을 키워 ‘감동랜드’로 거듭났던 시기가 바로 2014-2015시즌이었다.
전자랜드는 2라운드 초반 9연패에 빠져 10위까지 추락하는 위기를 맞았다.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 이어 아시안페러게임까지 열려 보기 드문 원정 8연전으로 시즌을 시작했다는 걸 감안해도 예상치 못한 시점에 찾아온 위기. 전자랜드는 빠르게 팀을 정비했다. 9연패 사슬을 끊은 직후 6연승 하며 단숨에 중위권으로 올라섰다.
세 시즌을 치르는 동안 득점력을 충분히 검증받았던 리카르도 포웰은 주장을 맡아 리더십까지 장착했다. 스킬 트레이너를 자처, 유망주들의 개인기 향상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할애했을 정도였다. 정영삼의 투혼도 빼놓을 수 없다. 시즌 초반 왼쪽 팔꿈치 인대가 끊어졌는데도 “두 다리는 멀쩡하다. 팀 내 최고액 연봉을 받는 선수라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라며 시즌을 완주했다.
시즌 초반 이후 4~6위에서 순위 싸움을 이어간 전자랜드의 최종 성적은 25승 29패 6위. 주전들이 과부하에 걸려 막판 7경기에서 1승에 그치며 5할 승률은 사수하지 못했지만, 시즌을 3승 10패로 시작했다는 걸 감안하면 놀라운 반전이었다.
전자랜드가 본격적으로 돌풍을 일으킨 건 플레이오프였다. 6강 상대는 서울 SK. 세 시즌 동안 1위-3위-3위를 기록한 강팀이었고, 전자랜드는 정규리그 상대 전적에서도 2승 4패 열세였다. 뚜껑을 열자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전개됐다. 전자랜드가 1차전에서 87-72로 승, 이변을 일으킨 데 이어 3차전까지 내리 따내며 4강에 진출한 것.
애런 헤인즈(SK)가 1경기 만에 아웃되는 변수가 있었다는 걸 감안해도 KBL 역사상 보기 드문 업셋이었다. KBL 출범 후 6위가 3위를 꺾고 4강에 진출한 건 단 네 번에 불과하다. 전자랜드가 마지막 사례며, 이 가운데 스윕으로 시리즈를 마무리한 건 전자랜드가 유일했다.
기세를 몰아 원주 동부(현 DB)와의 4강 1차전까지 승리, 창단 첫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도전했던 전자랜드의 질주는 4강 5차전에서 마무리됐다. 포웰이 김주성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더블 테크니컬 파울을 받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추격을 이어갔지만, 1점 차로 뒤진 경기 종료 11초 전 앤서니 리처드슨에게 쐐기 3점슛을 허용하며 승기를 넘겨줬다.
“감독님이 한 번도 챔피언결정전에 오른 적이 없다고 하셔서 마지막 선물을 드리면서 떠나고 싶었다. 주장으로서 이기지 못해 미안하지만, 이 경기를 위해 내 모든 걸 쏟았다는 것만큼은 알아줬으면 한다. 내가 전자랜드에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팀도 너희도 계속 성장하길 바란다.”
포웰이 ‘마지막 선물’이라 표현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외국선수는 한 팀에서 3년 이상 뛸 수 없었다. 2012-2013시즌에 전자랜드로 돌아온 포웰은 규정 내에서 뛸 수 있는 기간을 모두 채웠고, 설상가상으로 외국선수 제도마저 바뀌었다. KBL은 화려한 개인기를 지닌 단신 외국선수가 뛰는 게 리그 흥행에 도움이 될 거란 판단에 따라 2015-2016시즌부터 장단신 외국선수 제도로 회귀하기로 했다.
이 제도에서 196cm 포워드 포웰은 토종 빅맨이 있는 팀 정도만 지명을 고려할 수 있는 자원이었다. 포웰이 2014-2015시즌을 전자랜드에서의 마지막 시즌이라 여겼던 이유다. 실제 포웰은 2015 외국선수 드래프트에서 하승진을 보유하고 있었던 KCC에 지명됐다(2015-2016시즌 중반 트레이드를 통해 전자랜드에 돌아올 거라곤 아무도 예상 못 했겠지만…).
어쨌든 전자랜드는 슬램덩크를 연상케 하는 결말과 함께 2014-2015시즌을 마쳤다. 4강 전력으로 평가받지 못한 시즌이었다는 점, 그룹이 계속해서 농구단을 운영하기로 결정한 이후 거둔 성적이었다는 점에서 전자랜드에겐 창단 첫 챔피언결정전 진출을 이룬 2018-2019시즌 못지않게 큰 의미를 지니는 시즌이지 않을까.
당시 사무국장으로 ‘감동랜드’를 함께했던 김성헌 고양 소노 운영팀장은 “2012년쯤 그룹에서 농구단 매각을 추진할 정도로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다른 팀들에 비해 FA 영입이 쉽지 않았는데 유도훈 감독님이 훈련량으로 그 부분을 메우며 준비한 시즌이었다. 9연패 당할 때만 해도 시즌 끝나는 줄 알았는데…(웃음). 올 시즌 정관장처럼 기적 같은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뤘지만, 당시 전자랜드는 그룹 내에서 농구단의 입지가 좁아진 터여서 더 절실했다. 5차전에서 마지막 1분을 못 버텨서 챔피언결정전에 못 올랐지만, 당시만 해도 가장 기억에 남는 시즌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사진_점프볼DB(문복주 기자), KBL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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