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프볼=홍성한 기자] “25년이요?” 1998년생 필자는 듣고 깜짝 놀랐다. “난 27살인데….” 내가 살아온 세월과 비슷했다. 사실 체감이 되지 않았다. 하나의 일을 25년 동안 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잠실학생체육관에 들어설 때면 들리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 25년 외길 인생을 걷고 있는 박종민 장내아나운서를 만나 그 이야기를 들어봤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1월호에 게재됐으며, 인터뷰는 2024년 12월 11일에 진행됐습니다.
SK 팬들이라면 아는 분들이 많을 법도 한데요. 일단 자기소개 먼저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농구장에서 열심히 떠들고 있는 25년 차 장내아나운서 박종민이라고 합니다. 모두 반갑습니다(웃음).
와 25년이라는 세월이 상상이 가지 않는데요?
그렇죠(웃음). 정확히 말하면 1999년에 원주 삼보(현 DB)에서 시작했어요. 그때만 해도 사실 장내아나운서라는 직업을 다들 모를 때죠. 경기장에서 말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팬분들이 이 사람이 해설위원인지 캐스터인지에 대한 구분이 아예 없었거든요.
오래된 시간만큼 자부심도 대단하실 것 같아요.
당연하죠! 작년, 재작년까지만 해도 현장에 제 선배들이 계셨는데, 지금은 아무도 안 계세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렇게까지 이야기해요. 농구 원로라고(웃음). 사실상 전 종목을 통틀어도 저보다 연차가 많은 장내아나운서는 없는 것 같아요.
이렇게 오랜 세월 하실 거라고 예상하셨나요(웃음)?
첫 경기가 아직도 기억나요. 생생하거든요. 하자마자 바로 천직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잘하진 못했죠. 제가 첫 경기에 옷이 다 젖었어요. 땀 때문에. 그런데 이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그때 딱 느꼈죠. 이 일이 내 천직이 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말이죠.
그전까지 농구에는 얼마나 관심이 있었나요?
‘슬램덩크’ 세대라 그때는 농구가 워낙 인기가 많았어요. 전 고려대 팬이었죠. 자연스럽게 현재 감독님이신 전희철 감독님을 굉장히 좋아했답니다. 이 일을 하고 가까이서 봤을 때 심장이 멎는 기분을 느낀 기억이 있네요.
원래 이쪽 길을 생각하고 계셨나요?
전공이 레크리에이션 쪽이었어요. 선배하고 여러 행사를 하다 우연한 기회에 농구장에서 하는 행사를 진행하게 됐죠. 그때 관계자분들이 저보고 ‘장내아나운서 한번 해보면 어떻겠냐?’라는 제의를 해주셨어요. 이렇게 시작하게 된 것 같아요.
그때 당시 선배 장내아나운서들 분위기는 어땠나요?
얼굴을 쳐다도 못 볼 정도였어요(웃음). 그 정도로 어려서 아무것도 모른 채 시작했거든요. 국내 최초 장내아나운서이셨던 염철호 선생님이 저한테 현장에서 용돈도 막 주고 그랬었어요. 정말 무작정 뛰어들었던 거죠.
그 시절이면 참고할 만한 자료가 하나도 없었을 것 같은데요?
맞아요. 정말 하나도 몰랐던 직업이었어요. 농구를 워낙 좋아했던 한 사람으로서 농구 정도만 이해하고 있었죠. 현장에서 뭘 진행한다는 것 자체를 상상하지 못했어요. 자료 자체가 없으니까 그냥 다른 구단 장내아나운서분들이 어떻게 하시는지 보러 가고 그랬던 기억이 있네요. 조금 꼰대 같을 수 있지만, 요즘은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많으니 행복한 거죠(웃음).
SK로 처음 오신 시점이 언제인가요?
2001년도에 SK가 연고지를 서울로 옮기면서 같이 오게 됐어요. 항상 SK에 감사한 마음이에요. 처음에는 연차가 워낙 낮으니 제 색깔 내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경기를 진행하는 데만 급급했죠. SK로 오면서부터 여러 가지 시도를 할 수 있었어요. 사실 투자가 없으면 좋은 분위기를 낼 수 없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진행하고 있는 것이 참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대로 잠실학생체육관 분위기는 10개 구단 중 최고라고 손꼽히는 곳인데요?
많이 가보셨겠지만, 우리처럼 미디어 파사드를 천장, 바닥 등 이 정도로 하는 경기장은 없어요. 구단의 지원이 없으면 힘듭니다. 이걸 알기에 저도 분위기를 최대한 살리려고 많이 노력해요. 올 시즌 바뀐 대행사도 많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의 목표가 있어요. 부산 사직야구장을 사직 노래방이라고 부르잖아요? 잠실학생체육관이 마치 사직야구장처럼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지난번에 학체 노래방이라는 표현을 쓴 적 있어요. 최적의 환경을 만드는데 그만큼 힘을 쏟고 있습니다.
오래 하신 만큼 기억에 남는 경기도 많으시겠죠?
너무 많죠(웃음). SK가 사실 예전에는 성적이 좋은 팀이 아니었어요. 그러다보니 저 역시 우승 경험이 없었죠. 시간이 지나 2017-2018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드디어 우승을 차지했거든요? 그때 마지막 경기를 지금도 못 잊어요. 제가 처음으로 진행해 본 우승 세리머니였죠.
다행히 최근 SK가 우승 확정할 때 마지막 경기가 모두 홈이었는데요?
남다르죠(웃음). 원정 경기에서 우승을 확정 지으면 경기 끝나고 홈 장내아나운서한테 마이크를 넘겨받아야 해요. 홈과 분위기가 너무 다르죠. 그래서 안양 KGC(현 정관장)와 챔피언결정전을 7차전까지 했을 때 5, 6, 7차전을 다 따라다녔죠. 비록 남는 것은 아쉬움이었지만….
가장 소름이 돋는 순간을 꼽아보자면요?
예전에 KBL에서 장내아나운서와 응원단장의 구분을 명확히 해야 한다면서 장내아나운서가 응원을 못하게 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되나요(웃음). 지금은 사라졌죠. 이후 관중들을 제가 일으켜 세워서 팬분들의 목소리로만 디펜스를 외칠 때면 정말 소름이 돋아요. 그 육성. 말로 표현할 수 없죠. 이 상황에서 SK가 역전을 했다? 그때만큼 짜릿한 순간이 없답니다. 혼자 힘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웃음).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다 보면 부침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예상하신 것과 달리 별로 없어요(웃음). 그냥 농구장에서 1년 내내 살 정도로 농구를 좋아했거든요. 얼마나 행복한 일이에요. 내가 좋아하는 농구를 바로 앞에서 직접 보잖아요. 정말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어 위기를 느낀 적이 없어요.
아무래도 목소리를 써야 하는 직업이니 목 관리가 중요할 것 같은데요?
맞아요. 지금도 감기 기운이 좀 있어요(웃음). 감기에 걸리면 목소리에서 딱 차이가 나요. 관중분들이 받아들이시기에 조금 거북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감기에 걸렸다 하면 집 밖은 아예 안 나가고 쉬어요. 얼른 나아야 하니까요.
선수들 결혼식 사회도 많이 보신다고 들었는데요?
많이 봤죠. 김선형 선수, 최원혁 선수 등등. 선수들뿐 아니라 구단 프런트 분들의 결혼식 사회도 본 것 같아요. 고마울 뿐이죠. 다들 알고 있는 연예인이나 친한 사람들이 있을 텐데 저한테 부탁을 한다는 건 애정이 있다는 뜻이잖아요. 일정이 겹치지 않으면 무조건 봐주려고 합니다. 아! 그런데 최부경 선수한테 미안해요. 도저히 뺄 수 없는 일정이라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습니다(눈물).
한 직업을 오랫동안 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을까요.
일단 꾸준해야 하는 거 같아요. 하는 일을 싫어하면 안 되고요. 쉽게 포기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도 홈 백투백 경기 정말 힘들거든요? 근데 그걸 감내해야죠. 본인이 행복해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요(웃음).
장내아나운서를 꿈꾸는 이들에게 조언을 해주자면요?
무조건 공부죠. 스포츠 장내아나운서는 담당하는 종목을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절대 하면 안 되는 직업이에요. 진행 자체가 안되는데요? 얕잡아보고 들어왔다가 실패한 경우가 많아요. 저는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자격 자체가 없다고 봐요. 관중들한테 상황을 설명해야 하니까요. 룰이 매번 바뀌니 저도 매년 공부하고 있답니다. 경기 진행은 룰을 다 이해한 다음에 하는 거죠.
장내아나운서로서 목표가 있다면요?
딱 2개입니다. 먼저 제가 농구와 관련된 진행은 올림픽 빼곤 전부 다 해봤어요. 언젠가 올림픽을 진행해 보고 싶어요. 최종 꿈이죠. 2036년인가요? 한국에서 올림픽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은데, 그때까지 오래 해야 할 것 같아요(웃음). 또 하나는 말도 안 되는 꿈일 수 있어요. SK 일반인 최초 영구결번이요(웃음). (번호를 고른다면요?) 음…. 100번이요(웃음). 선수들이 99번까지 달 수 있잖아요. 바로 그다음 번호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잠실학생체육관, 또 SK는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제 삶의 일부죠(웃음).
#사진_점프볼 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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