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훈의 인터뷰는 이처럼 미소로 시작이 됐지만 농구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선 초지일관 진지하게 답했다. 은퇴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고 지금은 예능인으로 익숙한 서장훈이지만 여전히 농구에 진심이었다. 이와 같은 마음가짐이 ‘한국 농구 1옵션’으로 군림한 원동력이었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12월호에 게재됐음을 알립니다.
원래 야구를 했고, 휘문중으로 전학을 온 이후에도 야구를 이어갈 계획이었다. 그때도 키가 큰 편이어서 선생님들이 농구를 권하셨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 말에 시작해서 또래들에 비해 농구를 못했다. ‘계속해야 하나’ 고민하던 와중에 고관절 부상 때문에 3개월 정도 쉰 사이 12cm가 자랐다. 그때부터 인생이 바뀌었다. 중3 때 키가 197cm였는데 당시 감독님이 흥분하셨는지 내 키를 202cm라고 표기해서 대회 팜플렛에 실었다(웃음). 그때부터 농구가 굉장히 쉬워졌고, 신문에서도 유망주라며 내 이름이 계속 나왔다.
현주엽과 함께 뛰었던 휘문고 시절을 돌아본다면?
둘 다 주목을 많이 받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완성형이라고 하기엔 어린 학생들이었다. 우리를 제외하면 포인트가드가 저학년이어서 하프라인을 넘어오는 것부터 문제가 있었다. 그래도 1년에 1, 2경기 정도만 졌다.
프로농구가 출범하기 전이었는데 당시는 고졸이 곧바로 실업에 갈 수 없는 구조였나?
그런 건 생각도 못했고 곧바로 실업에 간 선배도 없었다. 무조건 대학을 거쳐야 하는 시절이었다. 연고대의 영입 경쟁이 과열됐고, 연세대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굉장히 강하게 들기도 했다.
출연했던 ‘대화의 희열’을 보니 연세대가 여대생의 비율이 높은 학교였기 때문이라는 농담도 남겼던데?
그런 이유도 있긴 하다(웃음). 고교 시절 대학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가서 연습경기를 한 적이 종종 있었다. 고려대도 좋은 학교지만, 당시 고려대 체육관은 공대 끝에 외딴섬처럼 있었다. 반면, 연세대 체육관은 정문에 들어가자마자 있어서 ‘여기가 진짜 대학교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신촌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에도 학생이 굉장히 많아서 천국 같은 느낌이었다.
그 방송에서 가비지타임 멤버였던 중학생 시절 공식 대회에서 기록한 첫 득점을 최고의 슛으로 꼽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아직도 느낌이 생생하다. 아무도 관심을 안 가졌던 상황, 골밑에서 노마크 찬스, 누구도 박수 치지 않은 득점이었다. 집에 가는 내내 두근 두근거렸다. 수많은 득점을 올렸지만 그게 내 인생 최고의 득점이었다. 그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재능 있는 고교생은 곧바로 프로에 진출할 수 있는 시대다.
지금 시대에 농구를 했다면?
그래도 집안의 성향, 여러 가지를 살펴봤을 때 대학에 갔을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연세대를 갔을 것이다. 특별히 좋아했다기보단 청소년 대표팀 때부터 워낙 가깝게 지냈던 형들이 많았다. (이)상민이 형은 대표팀 시절 방도 같이 쓴 사이였다. 여러 가지로 살펴봤을 때 지금 시대였어도 연세대에 진학했을 것 같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내가 봤을 때 가장 큰 요인은 이거다.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김훈 등 함께 뛴 선배들은 하나 같이 인물도, 실력도 출중했다. 한 팀에 이런 선수들이 모여있다는 건 지금 있는 팀들을 살펴봐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면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굉장히 어필이 된 것 같다. 물론 나는 빼야겠지만(웃음), 학생들은 우리가 특기자인지 뭔지 자세히 모른다. 그들에겐 멋있는 선수들이 본인들이 선호하는 대학교에 모여 뛴다는 자체만으로 연세대를 응원할 가치가 있던 게 아니었을까. 나도 형들 덕을 봤지만 형들도 (팀 성적 면에서는)내 덕을 봤다. 그런데 농구는 이전부터 인기가 상승하고 있었다. 기아자동차, 더 거슬러 올라가면 허재 형이 있었던 중앙대 등등…. 내가 연세대에 입학한 시점서 정점에 오른 것이다. 거기에 ‘마지막 승부’, ‘슬램덩크’ 열풍도 함께 일어났다.
1학년 시절부터 성인무대를 평정했다.
잘될 거란 느낌은 있었다. 당시에는 고3도 미리 대학에 합류할 수 있었다. 기아자동차를 비롯한 실업팀들과 연습경기를 치렀는데 그때부터 우리가 이겼다. 얼마 전까지 (현)주엽이와 둘이 주고받으면서 했는데 대학에서는 더 좋은 가드, 슈터들이 같이 뛰니 내 능력치도 훨씬 많이 발휘된다는 걸 느꼈다. 내 입장에서 기아자동차는 대단한 팀이었는데 막상 연습경기에서는 우리가 이기니 ‘잘하면 실전에서도 이기겠는데?’ 싶었다. 실제로 1학년부터 농구대잔치 우승을 하고 MVP도 받았다. 입학 후 단 1년 사이에 이 모든 게 이뤄지니 정신없었다. 만 20살도 안 된 애였는데 매일 신문 1면에 나오니 ‘내가 엄청 대단한 사람이구나’라고 착각했다. 어쨌든 얼마 전까지 TV로 보던 선배들을 다 이기고 우승했으니 뭐든 해낼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생겼다.
연세대는 내가 2학년이 됐을 때 완성도가 훨씬 높은 팀이었다. 나도 점차 완성형으로 가고 있었고, 선배들은 함께 뛴 기간이 그만큼 늘어났으니 전승 행진을 이어갔다. 내가 목을 다치기 전까지. 목을 다친 후 여러 생각을 했다. 고민하던 차에 미국 대학에 다녀보는 것에 대해 고려하게 됐다. 그래서 산호세 주립대에 편입했다. 요즘 시대 같았으면 훨씬 더 수월하게 도전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잘됐을 거라고 단언할 순 없겠지만, 후배들처럼 G리그 드래프트라도 참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미국에서 지냈던 1년을 돌아본다면?
내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더 늦게 철들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누구나 알아보는 유명한 선수였지만, 갑자기 아무도 못 알아보는 곳에서 지내는 생활을 해보니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많이 고민했고,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1년이었다.
‘벤치만 앉아있다가 돌아왔다’라는 근거 없는 얘기에 대해선 오해를 풀고 싶을 것 같은데?
많은 사람이 잘못 알고 있는 정보를 글로 올리는 게 답답하다. 편입생은 무조건 1년을 쉬어야 한다. 경기를 뛸 수 있는 건 1년 후부터 가능하다. 규정상 벤치에 앉을 수도 없는데 ‘서장훈이 미국에서 경기도 못 뛰었다. 벤치만 달구다 왔다’라고 쓰더라. 나에 대한 사실을 논하는 건 뭐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심을 가지고 듣는다. 나에 대해 엉뚱한 얘기를 하는 시선은 짜증 난다. ‘연세대가 미군 부대랑 붙었는데 박살났다’라는 얘기도 있더라. 어디서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가 나오는 건가. 아무리 한국이 미국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 해도 고등학교까지 운동하다 군인이 된 사람들이랑 우리가 비교되겠나. 예전에 연습경기를 잡는 게 쉽지 않아서 실제로 붙어본 적이 있는데 엉망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미군부대에 졌다니…. 어휴, 상식을 벗어난 얘기다.
1년을 있어보니 특별한 비전이 없었다. 전국 방송이 되거나 성적이 좋은 팀이 아니었다. 내가 없는 1년 사이 연세대는 성적이 좋지 않았고, 최희암 감독님으로부터 이제 그만하고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기도 했다.
영어로 생활하는 게 불편하진 않았나?
많이 불편했다. 영어를 못하는데 학교는 다녀야 했으니까. 확실한 비전이 있었다면 죽기 살기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았을 것이다. 산호세는 남으라고 했다. 이제 경기를 뛸 수 있는데 왜 돌아가냐고 했지만, 더 이상 남아있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비하인드 스토리를 말하자면, 고등학생 시절에 미국 진출을 알아보기 위해 여러 학교에 내 영상을 보냈다. 애리조나, 시라큐스, 오클라호마 주립대(OSU) 등등에서 입학과 관련된 얘기가 오갔다. 집으로 편지까지 왔다. 문제는 당시 기준으로 토플 테스트 500점 이상이 나와야 입학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내가 몇 달 만에 영어를 잘할 수 있겠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OSU에서 나를 불렀다. 그래서 미국까지 건너갔는데 땅 진짜 넓더라. 굉장히 오랫동안 감독을 맡고 있었던 에디 서튼이라는 감독이 있었다. 미국농구 명예의 전당에 오른 명장이었는데 그 당시 선수를 직접 만나면 안 되는 규정이 있었다. 그래서 어시스턴트 코치를 통해 테스트를 봤고, 감독도 체육관 위에서 그 모습을 다 지켜봤다. 나를 진짜 좋아했고, 2년 정도 뛰면 “내가 널 책임지겠다”라고 했다. 문제는 감독이 학교에 아무리 얘기해도 토플 테스트 점수가 안 나오면 입학이 안 된다는 점이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어떤 문제인가?
오클라호마 컬리지에서 1년을 보내면 OSU로 편입이 된다고 했다. 그 감독이 책임질 테니 1년만 뛰고 오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한국에서 유명한 선수이지 않았나. 미국 진출한다고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나왔는데 NCAA 1부도 아니고 이름도 생소한 컬리지에서 뛴다는 건…. 나는 괜찮은데 주위의 시선, 기대가 크지 않았나. 그나마 산호세는 1부 대학이어서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다시 얘기하지만 1년 동안 경기도 못 뛰고 벤치만 앉아있다가 돌아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언론을 통해 명문 대학에 직행하는 게 어려운 전후 상황을 얘기할 순 없었나?
요즘처럼 인터넷이 활성화됐다면 모르겠지만 종이 신문 보던 시절이었다. 지금 시대였다면 G리그에서 테스트받거나 드래프트에 나가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부분이 아쉽다. 물론 요즘 시대라 해도 미국에 가면 어려운 점이 있었겠지만 그 당시 나는 내 농구 인생에서 가장 몸이 좋을 때였다. 세계선수권 시절 영상을 지금 봐도 누구에게 크게 안 밀렸다. 얼마 전에 오랜만에 영상을 보니 ‘오, 생각보다 잘했는데’ 싶더라. 연세대와 브리검영대가 자매결연을 맺어 하와이에 있는 학교들과도 연습경기를 많이 치렀다. 브리검영 감독도, 다른 학교 감독들도 “쟤는 미국에서 농구해도 될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프로 데뷔 이후 NBA 선수들도 참가할 정도로 유명한 빅맨캠프가 있었는데 한국에서 나를 비롯한 몇 명이 참가했다. 캠프를 총괄하는 분이 굉장히 유명한 지도자였는데 나보고 몇 살이냐고 물어봤다. 만 25살이라고 하자 “조금만 일찍 미국에 왔다면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내가 욕심이 많은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20대 중반이 만족한다는 거 자체가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 나이에 뭘 이뤘다고 만족하나. 우승 한 번 하면 만족해도 되는 건가. 어떤 일을 하든 그걸로 만족하는 사람이라면 퇴보할 수밖에 없다. 거기서 샴페인을 터뜨렸다면 오늘날의 서장훈도 없었을 것이다. 어릴 때 농구 좀 하는 정도로 잠깐 기억되고 잊히지 않았을까.
지금과 같은 외국선수 1명 출전 제도에서 뛴다면?
상상만 해도 너무 즐거운데…. 하고 싶은 얘기는 너무 많지만 상상에 맡기겠다(웃음). 시대 보정이라느니, 그 당시 외국선수 수준 운운하며 폄하하는 시선도 있다. 웃기는 얘기다. 2000년대 중반 자유계약제도에서는 지금보다 훨씬 비싼 선수들이 왔었다. 유럽에서 최고 수준의 선수들이었다. (잠시 한숨을 쉰 후)외국선수 2명이 풀타임으로 뛰는 경기해 봤나? 양 팀 합해 외국선수 4명이 40분 내내 뛰는 와중에 1옵션으로 버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강의나 여러 방송에서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못 이긴 다”라는 말을 ‘극혐’했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즐거울 수가 있겠나. 프로 진출 전까지 내가 뛰었던 팀은 대부분 우승했다. 지는 건 어색한 일이었다. 그런데 프로에 오니 외국선수, 샐러리캡 제도가 있어서 내가 뛰는 팀이 무조건 유리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농구 팬들의 시선은 ‘서장훈이 있는 팀은 이기는 게 당연해’였다. 내가 대학 시절에 최강으로 군림했으니 우리 팀이 지는 것에 짜릿함을 느끼는 이들도 많았다. 또 하나, 알다시피 나는 여러 가지로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많았다. 어릴 때라 심판에게 과하게 항의하는 모습까지 더해지니 농구 팬들 사이에서 나는 빌런이었다. 그런 입장이었기 때문에 즐길 수가 없었다. 그런 시선을 견뎌내는 방법은 내가 내 힘으로 이 모든 걸 무찌르고 이기는 것이었다. 그게 쉽나. 우리 팀도 좋은 외국선수가 뛸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면 죽기 살기로 해야 한다. 죽기 살기로 해야 하는데 즐기긴 뭘 즐겨? 내가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 못 해서 그렇게 얘기했다는 반응도 있는데 그걸 왜 이해 못했겠나. 고통스러운 과정을 즐기는 게 승자라는 건데 그 말 자체가 모순이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고, 코뼈가 부러지고, 목이 부러지는데 즐길 수 있겠나. 모순을 왜 강요하나.
집중 견제로 인해 항상 몸 여기저기에 상처도, 부상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거세게 항의하는 모습에 대한 억울함도 많이 쌓였을 것 같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다 지난 일이고 내가 과했던 면도 있다. 심판들도 각자 위치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고, 어떻게 내가 원하는 부분만 볼 수 있겠나. 그래도 섭섭한 부분이 있다면, 조금만 더 불어줬다면 1만 5000점은 넘겼을 것이다. 아무리 봐도 야투 시도에 비해 자유투 얻은 개수가 너무 적었다. 나는 성격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걸 파울이라고 항의하진 않는다. 쪽팔려서 그렇게는 안 한다. 내 앞에서 파울이 일어난 상황을 봤는데 파울 선언을 안 하니까 그렇게 항의했던 것이다. 미련한 짓일 수도 있고 변명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잘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 상황이 쌓이는데 실실 웃고, ‘OK’라며 받아들이고, 지면 ‘졌나 보다’ 하고 놀았으면 내가 그렇게까지 득점할 수 있었을까.
20점 못하면 부진했다는 기사가 나왔으니 억울할 만했다.
나는 커리어 중반까지도 15점 하면 부진하다고 했다. 아니, 뭐 얼마나 더 넣어야 돼? 선수가 시즌을 치르다 보면 컨디션이 안 좋은 날도 있는 것 아닌가. 요새 평균 15점이면 최고 수준 아닌가. 지금 생각해 보면 다 웃기고 서운한 일인데 그때는 아직 젊었을 때라 이해 못 할 상황이 너무 많았다. 15시즌 치르는 동안 거의 MVP 후보로만 올라갔다. 기자단 투표로 뽑는데 MVP 딱 두 번 받았다. 그나마도 한 번은 공동 수상. 그때는 젊은 마음에 섭섭했다. ‘도대체 나한테만 왜 이럴까?’ 싶었다. 평균 25점 10리바운드를 해도 날 뽑지 않았다. 그래서 프로에 온 후 상 받는건 포기했다(웃음).
MVP 후보로 올랐던 2001-2002시즌 시상식에서 있었던 일화다. 당시 신인이었던 김승현이 MVP로 선정되자 화가 많이 났다고 들었다.
그때는 화가 났었다. 당시 내 생각엔 팀도 정규리그 2위를 하고 개인 기록은 얘기할 것도 없고…. (김)승현이는 나랑 정말 친한 사이지만, 당시 신인이었다. 신인상에 뭐 별별 상을 다 받았다. 그래서 ‘MVP는 나를 주는건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안 주더라(웃음). (단체 사진 촬영도 안 했다던데?) 맞다. “MVP 김승현” 얘기 듣자마자 짜증이 나서 바로 집에 갔다. 안 서운하면 그게 이상한 사람 아닌가. 지금 생각하면 그런 일들이 나에겐 자극제가 됐던 것 같다. 승부욕을 끌어올리는 원동력 가운데 하나였다.
2003-2004시즌 중반부터 은퇴할 때까지 목 보호대를 착용하고 경기를 뛰었다. 담당 의사가 은퇴해야 한다고 말렸던 건 선수 시절 알려지지 않은 얘기였는데?
숨겨야 했다. 몸 상태에 대해 설명하자면 경추협착증이다. 목이 뒤로 꺾이면 신경이 눌려 마비가 되는 부상이었다. 쉽게 말해 목이 뒤로 안 꺾이면 되는데 교통사고만 나도 꺾일 수 있는 게 목이다. 살다 보면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 줄 모르지 않나. 그래도 30대 초반인데 그게 무서워서 은퇴한다? 다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는 못하겠더라. 그래서 보조기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보호대도 만들어 보고 별별 짓 다 해봤다. 그냥 목만 고정하는 걸로 만들었는데 그걸 착용하면 목을 돌릴 수 없다. 그러니까 양옆 시야가 가려지고, 누가 슛하면 공을 봐야 하는데 제대로 못 봐서 리바운드할 때 어려움이 따랐다. 목을 조이고 있으니 얼마나 숨차겠나. 그래도 뭐 …. 차고 뛰어보니 할만해서 뛰었다. 무식한 짓이지만 그렇게라도 뛰고 싶었다. 30살에 은퇴하면 뭐하고 살았겠나.
솔직히 말하면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는 노화가 있다. 내가 농구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일반적으로 키를 꼽겠지만, 키 크다고 다 성공하는 건가. 키 말고도 내가 잘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는 누구보다도 힘이 좋았고, 그래서 외국선수들과 경쟁할 수 있었다. 골밑에서 몸싸움하려면 힘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나이가 들면 가장 먼저 노화가 찾아오는 부분이 힘이다. 30대에도 20대 시절의 힘을 유지할 수 없다. 국내선수가 막으면 얼마든지 몸싸움할 수 있지만, 외국선수와 계속 골밑에서 경쟁하기엔 힘이 점점 떨어졌다. 외국선수들은 어려지는데 나는 점점 나이를 먹으니 언제까지나 골밑에 있을 순 없었다. 그걸 조절하다 보니 외곽에서 슛을 던지는 빈도도 높아졌다. 내 최고 장점은 슛인데 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나. 나는 “누구보다도 연습을 많이 했다”라는 말은 못 하지만, 경기 전 이 선수를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에 대한 분석은 제일 많이 했다. 그래서 상대의 특성에 맞춰 농구를 할 수 있었다. 빅맨이 슛 던진다고 뭐라 하는 건 지금 시대에는 다 쓸데없는 얘기가 되지 않았나. NBA에서도 아무리 신체조건 뛰어난 선수라 해도 슛 능력 떨어지면 방출된다. 골밑 공간도 좁아진다. 예전에는 그런 개념조차 없었다. 외국선수를 외곽으로 끌고 나오면 우리 팀 선수가 커트인 할 공간도 만들 수 있는 건데 그렇게 생각해 보면 내가 요즘에 뛰었어야 했다(웃음).
FA 신분이 됐을 때는 항상 새로운 팀으로 옮겼다. 물론 상황은 다 달랐지만, 그래도 팀을 옮길 때 기준이 있었다면?
먼저 얘기하고 싶은 건, 나를 ‘저니맨’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는 점이다. ‘저니맨’의 정의를 모르는 게 아닌가. 나처럼 연봉 많이 받는 ‘저니맨’이 어딨나. KT만 빼면 그 팀이 원해서,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옮긴 것이다. 그 돈 받고 식스맨 노릇을 한 것도 아니다. 원래 있던 팀에서 계속 뛰고 싶은데 내 생각만큼 대우를 안 해준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팀은 대우를 더 잘해준다고 하면 그만큼 내 가치를 더 인정한다는 의미 아닌가. 내 가치를 인정해 주는 팀에서 뛰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게 당시 서장훈에겐 자존심이었고,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내 탓도 있다. 요새는 개성도 인정하고 존중하는 시대지만, 그때는 나를 그렇게 어려워했다. 나도 개성이 강한 사람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그렇게까지 무리한 요구를 한 적은 없었다. 4, 5년 같이 있으면 서로 서운한 일도 생기는 거고 그러면 이적도 하게 되는 것이다. 서장훈 하면 떠오르는 팀은 없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다 옮길 만해서 옮겼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상민이 형 때문에 KCC로 갔는데 갑자기 상황이 그렇게 됐으니까…. 시작부터 뭔가 꼬였다. 전주에 상민이 형을 좋아하는 팬이 엄청 많았는데 그들이 나를 좋게 생각했겠나. 첫 단추부터 이상하게 꼬였다. 그래서 KCC에서의 생활은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없었다.
학창 시절까지 포함해 최고의 동료를 꼽는다면?
아무래도 연세대 시절에 함께했던 이들이 최고의 동료다. 왜냐면 그 이상으로 많은 연습을 할 수도, 그 이상의 조직력이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도 힘들다. 프로에서는 팀 전력이 계속 바뀌었으니 나와 오랫동안 뛴 선수가 많지 않다. 그나마 꼽자면 (조)상현이 정도? (강)혁이도 같이 오래 뛰었다. 상현이와 혁이가 나에게 어시스트를 많이 했다.
외국선수 가운데에는 SK의 첫 우승을 함께한 재키 존스를 꼽았는데?
맞다. 인성도 훌륭한 선수였다. KBL을 떠나게 된 과정이 안 좋았지만, 뭔가 명확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다. 나보다 7살 많았지만 여러 부분에서 나를 인정해 줬고, 경기력 측면에서도 상호 보완이 됐다. 그래서 나도 더 잘할 수 있었다. 지금 뛰어도 손색이 없다. 3점슛에 높이, 블록슛, 리바운드, 아웃렛 패스까지. 젊은 시절에 왔다면 더 훌륭한 커리어를 쌓았을 것이다. 아까 얘기한 거지만 요새 사람들이 자꾸 시대 보정 이야기를 하는데 지금 뛰고 있는 외국선수라고 다 잘하는 건 아니지 않나. 보면 기가 차는 선수도 있더라(웃음). 지금 경쟁력 떨어지는 외국선수가 그 시대로 돌아가면 최고가 되나. NBA에서도 카림 압둘자바, 윌트 체임벌린, 샤킬 오닐이 지금 시대에 뛰면 못 했겠나. 하늘을 뚫고 다니는 선수들이었다. 다 박살냈을 것이다.
현역 중 눈길이 가는 선수를 꼽는다면?
얼마 전 집에서 경기를 보는데 이정현(소노)이 눈에 띄었다. 솔직히 말하면 대학 경기는 못 봐서 대학 시절에 어느 정도 선수였는지 모르지만, 프로 데뷔 후 모습을 계속 보니 굉장히 많이 성장했다. 그 정도 레벨의 선수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수 시절 2002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획득한 금메달을 “밀린 숙제를 해결한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금메달은 농구선수로서 최고의 성과인가?
성과이긴 했지만, 연세대에서 뛴 4년도 빼놓을 수 없다. 농구대잔치에 실업팀이 모두 출전했는데 목을 다쳤던 시즌을 빼면 다 우승했고 MVP도 받았다. 거기서 어느 정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프로에서 우승을 많이 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내가 가진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 내 커리어에 대해 누가 뭐라고 하든 아무도 나만큼 득점 못 하지 않았나. 나까지 없었다면 KBL 출범 후 국내선수는 전부 보조 역할만 하다 끝났을 것이다. 커리어 내내 1옵션으로 뛴 국내선수가 1명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아무도 없었다면 너무 슬픈 일이 됐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나의 가장 큰 자부심이다.
대학 시절부터 국가대표를 13년 정도 했다. 중국이 워낙 강했던 시절이어서 나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는데 그 기대에 못 미치는 게 늘 한이었다. 그나마 한 번이라도 깨서, 명승부여서, 우리나라에서 딴 금메달이어서 좋았다. 대표팀에서 10여 년 동안 함께 한 동료들 모두 제대로 정점을 찍었고, 그걸로 국가대표로서 소임은 다 했다고 생각한다. 2002년 이후 2006 아시안게임에서 세대교체를 해서 내가 최고참으로 한 번 더 나갔다. 당시 대표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이 있었다. 내 청춘을 바쳐 대표팀에서 뛰었는데 마지막이 너무 허무하게 끝이 났다. 그거 하나는 좀 아쉬움이 남는다.
전성기에서 내려가고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다.
2005-2006시즌, 그러니까 30대 초반에 처음 평균 20점 미만으로 내려갔다. 충분히 득점을 더 할 수 있는데…. 얼마든지 20점을 다시 할 수 있는데…. 지도자들이 자꾸 내 나이를 의식했고, 그러다 보니 출전시간이 점차 줄어들었다. 아무리 잘하는 선수라도 출전시간 줄어드는 데에는 장사 없다. 전자랜드에서의 마지막 시즌에 평균 16점 정도 했는데 전성기에 비하면 평균 출전시간이 10분 줄었다. 딱 그 차이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긴 했지만, 아쉬움이 남았던 건 사실이다. 서른셋, 넷 이후부터 ‘더 뛸 수 있는데 왜 자꾸 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뺐다고 팀 성적이 엄청 좋았던 것도 아니다. 그 와중에도 나쁘지 않다는 걸 보여주려고 어떻게든 몸부림을 쳤다. 그래서 38살 전자랜드에서의 마지막 시즌에도 국내선수 득점 1위는 했다. 그럼 38살까진 멀쩡했다는 얘기인데…. 그 다음 시즌 LG에서 여러 가지 트러블이 일어나면서 내 농구 인생은 비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동안 팽팽하게 잡고 있었던 긴장이라는 고무줄을 나 스스로 내려놓았고, 더는 버티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자랜드에서 옮기지 말았어야 했다.
몸은 이미 끝났지만, 그렇게 은퇴하는 건 도저히 못 받아들이겠더라. KT, 전창진 감독님이 도와주셔서 마지막 은퇴 시즌을 치를 수 있었다. 이미 전 시즌에 내가 유지해 왔던 것들을 다 내려놨기 때문에 뭔가를 보여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몸도 힘들었고, 무릎 상태도 너무 안 좋았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더는 못 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어서 참고 뛰었는데 KT 성적이 안 좋아서 미안하기도, 감사하기도 했다. 어쨌든 KT와 전창진 감독님 덕분에 점잖게 은퇴는 할 수 있었다. (지금도 ‘바람기억’을 들으면 그때의 감정이 떠오르나?)울컥한다. 10년도 넘게 지난 일이지만, 뇌리에 강렬히 남아있다. 내 전부를 바쳤는데…. 인생에서 더 이상 뭔가를 할 수 없게 된다면 슬픈 일 아닌가.
현역 선수나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글쎄, 조언…. 농구계를 떠나 있는 사람이 농구를 위해 열심히 하고있는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게 별로라는 걸 잘 안다. 내가 농구와 관련된 인터뷰를 안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그래도 굳이 한 가지를 얘기한다면, (잠시 뜸 들인 후)현실을 똑바로 봐야 한다. 자기들끼리 그 작은 공간에서 하는 일이 세상의 전부일 거란 생각을 하면 절대 안 된다. 현실은 너무나 크고 냉정하다. 작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본인의 인생을 결정짓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에게 냉정하고 객관적인 사람이야말로 선수 인생을 좋게 마무리할 수 있다. 이 정도만 얘기하고 싶다.
#사진_유용우 기자, 점프볼DB(문복주 기자), KBL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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